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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과 ‘실질’ -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단상 ‘촛불’이 일기 전, 아고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대통령 탄핵 서명. 당시 내가 속한 커뮤니티 M에서 일부 사람들이 “그런다고 해서 대안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당신 바보 아닙니까. 이 서명은 상징성을 갖는 거에요.”라는 대답이 자주 올라왔었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올라왔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였으며, 여기서 ‘기계적’이란 표현을 통해 어느 정도 연상이 되었겠지만, 이 서명이 갖는 의의를 모르는 사람은 눈치가 없거나 무식한 쪽으로 취급받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의 측면에선 ‘상징’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 그 자체였던 것 같았다. ‘촛불’을 통해 상징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왔던 것 같다.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상징을 기대한 채 ‘촛불’을 든 것일까. 그렇다면 그 ‘상징’이 지금의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온갖 부정적 속성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우리는 자연스레 묻지 않을 수 없다.1) ‘상징과 실질’이란 단어를 통해 나는 더 나아가 사람들이 꺼려했던 논쟁,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상징과 실질 그리고 폭력과 비폭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의 매개를 통해 묶일 수 있을 듯하다. 그 매개는 곧 상징과 실질, 폭력과 비폭력을 개체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묶여질 수 있는 ‘관련성’의 관점을 드러낸다. "여러 인간 집단들 간의 규제 또는 통제되지 않은 긴장과 갈등을 당사자들이 의식적으로 규제 또는 통제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국가 내부적 발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나 국가 간 발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전쟁 같은 폭력을 동반하는 싸움을 통하여 긴장 및 갈등이 해소되곤 하는데, 그것은 정말 어느 정도까지 불가피한 현상일까." - 노베르트 엘리아스,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 굳이 ‘촛불’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폭력과 비폭력’을 다룰 땐, 늘 ‘불가피함’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불가피하다는 말을 좀 연하게 풀어서 쓰자면, 어쩔 수 없다는 뜻과 비슷하다. 우리가 그리고 미디어들이, 그리고 그 미디어를 통해 목소리를 낸 수많은 글쟁이들과 논객들이 ‘폭력과 비폭력’에 대해 주저했던 것엔 ‘불가피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 문제는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렵다는 것이 마냥 나쁜 건 아닐 것이다. 이 문제가 어렵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를 둘러싼 긴장감과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긴장감과 갈등은 견해의 대립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 견해를 포괄하는 한 사회의 내적 속성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긴장감과 갈등은 나는 나, 너는 너 식의 선명한 구분으로선 전혀 이해될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개인과 사회 간의 관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개인과 사회는 ‘구분체’가 아닌 ‘상호결합체’로서 함께 간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폭력이란 단어를 통해 어떤 영상들을 떠올리고, 그 영상이 주는 편견 속에서 어느 한 쪽에만 폭력이란 글자를 새겨준다면, 이 논쟁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말한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낼 필요가 있다. 엘리아스에게 양자 간 세력에서 ‘0’이란 ‘세력지수’는 매겨질 수 없는 것이다. 세력의 불균등성은 있을지언정, 그 불균등성이 상대적으로 약자인 사람의 ‘세력지수’를 0으로 상정하진 않는다. 엘리아스의 말처럼 개인 혹은 개인이 속한 집단은 각각 세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역시 세력 간의 ‘불균등성’이다. 그 ‘불균등성’이 주는 어떤 이미지의 편견이 상대적으로 약자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력지수를 상쇄시킨다. 공권력 집단 대 국민의 구도. 국민은 공권력으로 대변되는 집단에 비해 ‘세력이 없는’ 것일까. 이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국민은 세력이 있다. 물대포와 전경의 공격성이 상대적으로 국민의 세력지수를 0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국민의 능동성을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폭력과 비폭력이란 문제는 자칫 ‘물화’의 길을 건너갈 수 있다. 그 ‘물화’의 과정은 폭력을 연상시키는 온갖 육체성의 발현과 그 육체성과 결합된 기계적 도구들의 무지막지한 활용을 언급한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답이 없는, 앞에서 언급한 ‘불가피함’의 바다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원치 않는 허우적거림 속에서 끝없는 말과 말의 섞임, 글과 글의 마주 봄을 목격한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정부는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대적인 스포츠 축제나 독도 문제가 아니라면 “대한민국 나의 사랑!”이란 구호의 상징성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이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나의 사랑!”은 실질적인 무엇인가가 되길 원한다. 여기서 ‘실질적’이라는 표현은 이명박 정권이 추구하는 ‘실용적’이란 단어와 어느 정도의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실질과 실용이란 단어를 통해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무엇을’ 원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디어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이유를 꼽았을 때, 지지자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그를 뽑은 이유가 ‘경제 살리기에 대한 희망’이었음을 기억해보자. 경제는 ‘현시성’을 기반으로 한다. 즉,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그 ‘경제 지수’들을 보라. 지수를 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며, 그 지수의 이상적 달성이란 국민의 삶 가운데 국민 스스로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경제 지표는 지금으로 봐선 ‘상징’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상징’과 ‘실질’은 둘 다 ‘보여줌’을 공통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으나, 지금 국민들 가운데 그 경제 지표가 ‘상징’으로 남길 바길 바라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토록 ‘소통! 소통!’을 외치는데, 그 소통의 어긋남은 결국 상징과 실질의 어긋남이기도 하다. ‘촛불’을 통해 국민들이 내건 무기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이 일어났던 것엔 반대편에 있었던 정부의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 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란 틀 안에서 정부는 공권력의 유연적 사용을 확대시켰고, 그로 인한 국민들의 저항은 거세졌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국가 = 폭력, 국민 = 비폭력의 분명한 선이 깨어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실질적 커뮤니케이션과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차이는 즉시성과 항구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되도록 ‘단 시간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고로 이명박 정부의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은 촛불집회 기간 동안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즉시’ 정리하길 원했다. 이명박의 그 불도저식 ‘CEO 리더십’이란 수사를 여기에 갖다 대는 것은 잔인한 것일까. 나는 전혀 아니라고 본다.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 추구하는 즉시성과 그것으로 인한 압력들은 분명히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반면에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은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에 비해 어떤 항구성을 지닌다. 여기서 상징은 상징을 표현하는 기간 동안 해석의 차원이 될 수도 있고, 표현하는 기간 이후, 사람들의 해석과 평가를 통해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촛불’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과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 섞여 있었다. 특히 광장에 나간 국민들은 촛불이란 상징성이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실질적 환경들의 해악적 요소들을 처리해주길 원했다.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로 와서, 비폭력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 상징의 힘은 ‘준’환상적 기제로서, 사람들의 내면에게 스며들었으며, 그 스며듦이 행여 무기력해선 안 된다는 강박은 87년 민주화 항쟁과 같은 약간은 엉뚱한(?) 역사적 살붙임으로 나타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살붙임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줄 것인가에 대해선 나는 약간 회의적이다. 촛불은 촛불로서 봐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폭력과 비폭력을 이야기할 때. 자극과 반응이란 표현을 쓰길 좋아하는 것 같다. 이것은 곧 둘 간의 ‘불가피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껄끄러운 방향으로 나아가자면, “공권력이 국민에게 행사되는 순간에 국민이 취하는 어떤 행위가 과연 ‘폭력’일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라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 다시 ‘세력’의 문제를 끌어오고 싶다. 과 연 우리는 폭력과 비폭력을 드러내는 장면들 속에서 공권력이 갖는 어떤 이미지로 인해 공권력이 더 세력이 크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촛불’을 든 국민들의 세력은 공권의 물리력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국민이 지닌 잠재력이자 장점이다.) ‘대응’의 차원에서 ‘촛불’ 을 통해 비폭력의 무력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촛불’의 상징성이 어떤 실질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상징성이 현실의 무엇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음은 어느 정도 시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자연스레 지금 이 정권이 비합법적인 과정을 통해 성립된 것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명박을 싫어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투표를 통한 정식 절차를 밟아 탄생했다. 이 정부에겐 정당성이 있다. 여기서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부각된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당위는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정당성과 비정당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 추구하는 어떤 성취감은 역사적으로 비정당성을 강하게 보였던 순간에 나타났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은 그 스스로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조’의 측면이 필요하며,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는 집단의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부조리와 비정당성이 부각될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2)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삶의 변화였을까, 그리고 그 삶의 변화가 정권의 교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정권 교체 이후 우리는 올바른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바로 선출할 수 있었을까.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에 이러한 의문점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엄밀히 말하자면 ) 매개된 경험을 통해, 어떤 학습된 기억을 통해 알고 있던 그런 혁명의 기운들을 정말 갖고 싶어 했던 것일까도 포함된다. 그 가운데 폭력의 불가피성으로 인한 어떤 유토피아의 갈망까지 정녕 촛불에 참여한 사람들은 갖고 있었는지도 물어봐야 할 것이다. 혁명은 우리 시대의 ‘상징적 사건’인가, 혹은 ‘실질적 사건인가’ ‘촛불’이란 상징을 통해 저항해왔던 사람들 가운데, 폭력의 용인을 통한 이상향의 갈망을 주장한 사람들은 ‘촛불’ 이 순간이 우리에게 혁명을 알리는 시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촛불을 통해 견지해야 했던 건 국민들이 든 ‘촛불’의 상징성이 비폭력이라는 상징성을 만나 결합되는 어떤 힘이었을 것 같다. 물론 그 상징성이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 추구하는 어떤 즉시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촛불의 시간’을 ‘혁명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을까 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아닐 것이다. ‘촛불’은 ‘잘 살고 싶다’는 장시간적인 측면이 있는 상징적 항구성이 있으면서도, 그 ‘잘 살 고 싶다’의 범주엔 사실 사람들의 생활고 해소라는 실질적 즉시성이 함께 들어있었다. 이 가운데 폭력과 비폭력을 다시 살펴본다면, 비폭력이 가진 어떤 항구적인 이미지와 폭력이 가진 어떤 즉시적인 이미지는 만나는 부분이 있다. ‘촛불’은 무엇인가를 영원히 갈구하면서도, 바로 나올 무엇인가를 또한 원했다. 프로이드의 견해를 빌리자면, 욕구의 표출과 그러한 욕구의 표출이 억제되면서 오는 무기력한 형태가 바로 ‘촛불의 휴지기’를 앞당긴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가운데 폭력과 비폭력의 논쟁은 성과를 향한 항구성과 즉시성의 줄다리기로 이어진다. ‘촛불’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은 하나의 목소리만은 아니었다. 뭔가 합치된 것 같으면서도, 분열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간을 함부로 ‘혁명의 시간’이라 규정지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이 어떤 시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과거의 역사라는 학습된 기억에 너무 머무르지 말고, 현재와의 대화에 충실해야 할지도. 그래서 ‘촛불’은 ‘2008년의 촛불’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예상치 못한 실질적 공리를 위한 상징적 작업인지 모른다. 1) 그렇다고 해서 ‘촛불’이 어떤 기능을 반드시 수행해야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촛불’이 ‘기능’이 된다면, 그것은 원치 않는 피로감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촛불’을 일종의 기능으로 보려는 수많은 촛불평론들을 접하면서, 자신이 배운 이론을 삽입하기에 바빴던 지식인들의 엇나간 ‘선지자 콤플렉스’를 목도했다. 2) 이명박 정부의 부조리함이 이 정부의 비정당성으로 이어지기엔 무리가 있다. 고로 정당성을 확보한 이 정부가 표출하는 세력의 외화는 ‘촛불’의 상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사람들과 결합했다. ‘촛불’은 알다시피 긍정적 상징성만 있는 것이 아니며, 부정적 상징성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 그 부정적 상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선, 이 정부가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징’과 ‘실질’ -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단상 ‘촛불’이 일기 전, 아고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대통령 탄핵 서명. 당시 내가 속한 커뮤니티 M에서 일부 사람들이 “그런다고 해서 대안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당신 바보 아닙니까. 이 서명은 상징성을 갖는 거에요.”라는 대답이 자주 올라왔었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올라왔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였으며, 여기서 ‘기계적’이란 표현을 통해 어느 정도 연상이 되었겠지만, 이 서명이 갖는 의의를 모르는 사람은 눈치가 없거나 무식한 쪽으로 취급받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의 측면에선 ‘상징’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 그 자체였던 것 같았다. ‘촛불’을 통해 상징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왔던 것 같다.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상징을 기대한 채 ‘촛불’을 든 것일까. 그렇다면 그 ‘상징’이 지금의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온갖 부정적 속성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우리는 자연스레 묻지 않을 수 없다.1) ‘상징과 실질’이란 단어를 통해 나는 더 나아가 사람들이 꺼려했던 논쟁,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상징과 실질 그리고 폭력과 비폭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의 매개를 통해 묶일 수 있을 듯하다. 그 매개는 곧 상징과 실질, 폭력과 비폭력을 개체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묶여질 수 있는 ‘관련성’의 관점을 드러낸다. "여러 인간 집단들 간의 규제 또는 통제되지 않은 긴장과 갈등을 당사자들이 의식적으로 규제 또는 통제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국가 내부적 발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나 국가 간 발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전쟁 같은 폭력을 동반하는 싸움을 통하여 긴장 및 갈등이 해소되곤 하는데, 그것은 정말 어느 정도까지 불가피한 현상일까." - 노베르트 엘리아스,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 굳이 ‘촛불’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폭력과 비폭력’을 다룰 땐, 늘 ‘불가피함’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불가피하다는 말을 좀 연하게 풀어서 쓰자면, 어쩔 수 없다는 뜻과 비슷하다. 우리가 그리고 미디어들이, 그리고 그 미디어를 통해 목소리를 낸 수많은 글쟁이들과 논객들이 ‘폭력과 비폭력’에 대해 주저했던 것엔 ‘불가피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 문제는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렵다는 것이 마냥 나쁜 건 아닐 것이다. 이 문제가 어렵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를 둘러싼 긴장감과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긴장감과 갈등은 견해의 대립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 견해를 포괄하는 한 사회의 내적 속성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긴장감과 갈등은 나는 나, 너는 너 식의 선명한 구분으로선 전혀 이해될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개인과 사회 간의 관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개인과 사회는 ‘구분체’가 아닌 ‘상호결합체’로서 함께 간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폭력이란 단어를 통해 어떤 영상들을 떠올리고, 그 영상이 주는 편견 속에서 어느 한 쪽에만 폭력이란 글자를 새겨준다면, 이 논쟁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말한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낼 필요가 있다. 엘리아스에게 양자 간 세력에서 ‘0’이란 ‘세력지수’는 매겨질 수 없는 것이다. 세력의 불균등성은 있을지언정, 그 불균등성이 상대적으로 약자인 사람의 ‘세력지수’를 0으로 상정하진 않는다. 엘리아스의 말처럼 개인 혹은 개인이 속한 집단은 각각 세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역시 세력 간의 ‘불균등성’이다. 그 ‘불균등성’이 주는 어떤 이미지의 편견이 상대적으로 약자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력지수를 상쇄시킨다. 공권력 집단 대 국민의 구도. 국민은 공권력으로 대변되는 집단에 비해 ‘세력이 없는’ 것일까. 이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국민은 세력이 있다. 물대포와 전경의 공격성이 상대적으로 국민의 세력지수를 0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국민의 능동성을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폭력과 비폭력이란 문제는 자칫 ‘물화’의 길을 건너갈 수 있다. 그 ‘물화’의 과정은 폭력을 연상시키는 온갖 육체성의 발현과 그 육체성과 결합된 기계적 도구들의 무지막지한 활용을 언급한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답이 없는, 앞에서 언급한 ‘불가피함’의 바다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원치 않는 허우적거림 속에서 끝없는 말과 말의 섞임, 글과 글의 마주 봄을 목격한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정부는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대적인 스포츠 축제나 독도 문제가 아니라면 “대한민국 나의 사랑!”이란 구호의 상징성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이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나의 사랑!”은 실질적인 무엇인가가 되길 원한다. 여기서 ‘실질적’이라는 표현은 이명박 정권이 추구하는 ‘실용적’이란 단어와 어느 정도의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실질과 실용이란 단어를 통해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무엇을’ 원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디어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이유를 꼽았을 때, 지지자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그를 뽑은 이유가 ‘경제 살리기에 대한 희망’이었음을 기억해보자. 경제는 ‘현시성’을 기반으로 한다. 즉,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그 ‘경제 지수’들을 보라. 지수를 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며, 그 지수의 이상적 달성이란 국민의 삶 가운데 국민 스스로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경제 지표는 지금으로 봐선 ‘상징’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상징’과 ‘실질’은 둘 다 ‘보여줌’을 공통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으나, 지금 국민들 가운데 그 경제 지표가 ‘상징’으로 남길 바길 바라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토록 ‘소통! 소통!’을 외치는데, 그 소통의 어긋남은 결국 상징과 실질의 어긋남이기도 하다. ‘촛불’을 통해 국민들이 내건 무기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이 일어났던 것엔 반대편에 있었던 정부의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 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란 틀 안에서 정부는 공권력의 유연적 사용을 확대시켰고, 그로 인한 국민들의 저항은 거세졌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국가 = 폭력, 국민 = 비폭력의 분명한 선이 깨어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실질적 커뮤니케이션과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차이는 즉시성과 항구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되도록 ‘단 시간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고로 이명박 정부의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은 촛불집회 기간 동안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즉시’ 정리하길 원했다. 이명박의 그 불도저식 ‘CEO 리더십’이란 수사를 여기에 갖다 대는 것은 잔인한 것일까. 나는 전혀 아니라고 본다.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 추구하는 즉시성과 그것으로 인한 압력들은 분명히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반면에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은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에 비해 어떤 항구성을 지닌다. 여기서 상징은 상징을 표현하는 기간 동안 해석의 차원이 될 수도 있고, 표현하는 기간 이후, 사람들의 해석과 평가를 통해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촛불’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과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 섞여 있었다. 특히 광장에 나간 국민들은 촛불이란 상징성이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실질적 환경들의 해악적 요소들을 처리해주길 원했다.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로 와서, 비폭력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 상징의 힘은 ‘준’환상적 기제로서, 사람들의 내면에게 스며들었으며, 그 스며듦이 행여 무기력해선 안 된다는 강박은 87년 민주화 항쟁과 같은 약간은 엉뚱한(?) 역사적 살붙임으로 나타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살붙임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줄 것인가에 대해선 나는 약간 회의적이다. 촛불은 촛불로서 봐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폭력과 비폭력을 이야기할 때. 자극과 반응이란 표현을 쓰길 좋아하는 것 같다. 이것은 곧 둘 간의 ‘불가피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껄끄러운 방향으로 나아가자면, “공권력이 국민에게 행사되는 순간에 국민이 취하는 어떤 행위가 과연 ‘폭력’일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라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 다시 ‘세력’의 문제를 끌어오고 싶다. 과 연 우리는 폭력과 비폭력을 드러내는 장면들 속에서 공권력이 갖는 어떤 이미지로 인해 공권력이 더 세력이 크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촛불’을 든 국민들의 세력은 공권의 물리력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국민이 지닌 잠재력이자 장점이다.) ‘대응’의 차원에서 ‘촛불’ 을 통해 비폭력의 무력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촛불’의 상징성이 어떤 실질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상징성이 현실의 무엇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음은 어느 정도 시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자연스레 지금 이 정권이 비합법적인 과정을 통해 성립된 것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명박을 싫어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투표를 통한 정식 절차를 밟아 탄생했다. 이 정부에겐 정당성이 있다. 여기서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부각된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당위는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정당성과 비정당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 추구하는 어떤 성취감은 역사적으로 비정당성을 강하게 보였던 순간에 나타났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은 그 스스로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조’의 측면이 필요하며,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는 집단의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부조리와 비정당성이 부각될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2)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삶의 변화였을까, 그리고 그 삶의 변화가 정권의 교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정권 교체 이후 우리는 올바른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바로 선출할 수 있었을까.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에 이러한 의문점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엄밀히 말하자면 ) 매개된 경험을 통해, 어떤 학습된 기억을 통해 알고 있던 그런 혁명의 기운들을 정말 갖고 싶어 했던 것일까도 포함된다. 그 가운데 폭력의 불가피성으로 인한 어떤 유토피아의 갈망까지 정녕 촛불에 참여한 사람들은 갖고 있었는지도 물어봐야 할 것이다. 혁명은 우리 시대의 ‘상징적 사건’인가, 혹은 ‘실질적 사건인가’ ‘촛불’이란 상징을 통해 저항해왔던 사람들 가운데, 폭력의 용인을 통한 이상향의 갈망을 주장한 사람들은 ‘촛불’ 이 순간이 우리에게 혁명을 알리는 시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촛불을 통해 견지해야 했던 건 국민들이 든 ‘촛불’의 상징성이 비폭력이라는 상징성을 만나 결합되는 어떤 힘이었을 것 같다. 물론 그 상징성이 실질적 커뮤니케이션이 추구하는 어떤 즉시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촛불의 시간’을 ‘혁명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을까 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아닐 것이다. ‘촛불’은 ‘잘 살고 싶다’는 장시간적인 측면이 있는 상징적 항구성이 있으면서도, 그 ‘잘 살 고 싶다’의 범주엔 사실 사람들의 생활고 해소라는 실질적 즉시성이 함께 들어있었다. 이 가운데 폭력과 비폭력을 다시 살펴본다면, 비폭력이 가진 어떤 항구적인 이미지와 폭력이 가진 어떤 즉시적인 이미지는 만나는 부분이 있다. ‘촛불’은 무엇인가를 영원히 갈구하면서도, 바로 나올 무엇인가를 또한 원했다. 프로이드의 견해를 빌리자면, 욕구의 표출과 그러한 욕구의 표출이 억제되면서 오는 무기력한 형태가 바로 ‘촛불의 휴지기’를 앞당긴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가운데 폭력과 비폭력의 논쟁은 성과를 향한 항구성과 즉시성의 줄다리기로 이어진다. ‘촛불’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은 하나의 목소리만은 아니었다. 뭔가 합치된 것 같으면서도, 분열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간을 함부로 ‘혁명의 시간’이라 규정지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이 어떤 시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과거의 역사라는 학습된 기억에 너무 머무르지 말고, 현재와의 대화에 충실해야 할지도. 그래서 ‘촛불’은 ‘2008년의 촛불’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예상치 못한 실질적 공리를 위한 상징적 작업인지 모른다. 1) 그렇다고 해서 ‘촛불’이 어떤 기능을 반드시 수행해야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촛불’이 ‘기능’이 된다면, 그것은 원치 않는 피로감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촛불’을 일종의 기능으로 보려는 수많은 촛불평론들을 접하면서, 자신이 배운 이론을 삽입하기에 바빴던 지식인들의 엇나간 ‘선지자 콤플렉스’를 목도했다. 1) 이명박 정부의 부조리함이 이 정부의 비정당성으로 이어지기엔 무리가 있다. 고로 정당성을 확보한 이 정부가 표출하는 세력의 외화는 ‘촛불’의 상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사람들과 결합했다. ‘촛불’은 알다시피 긍정적 상징성만 있는 것이 아니며, 부정적 상징성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 그 부정적 상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선, 이 정부가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 내가 노베르트 엘리아스를 알게 된 때는, 대학원 첫 학기였다. 교수님의 그 엄청난 독서량이 주는 신뢰감은 매 주 나에게 준자발적 읽을거리를 던져주었고, 그 가운데 엘리아스의 [모차르트]와 [문명화 과정]을 만났다.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속에서 엘리아스가 인간의 속성으로 꼽는 문명화, 그것으로 인한 삶의 양식적 진화는 인간의 수치심과 당혹감 이란 내면 세계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 그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수치심과 당혹감이란 것은 결국 '나' 혼자선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여기서 '너'의 개입이 필요하다.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너는 너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엘리아스가 [사회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칭대명사의 힘을 설명하며 꺼내는 질문이다. 엘리아스의 사고를 따라가자면, 결국 이것은 우리가 철학을 역사적으로 훑을 때 언급되는 '타자'라는 개념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회학을 부담 없이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사회학이란 무엇인가]는 엘리아스의 유머러스함을 느낌과 동시에 "아, 사회학이란 것이 이런거구나."를 동시에 얻어갈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사실 '사회학'을 아예 모르고 읽어도 되는 책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기시감을 갖고, 사회학적 정신의 열기를 수긍하겠다는 지성적 태도가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엘리아스의 유머러스함은 위대한 학자들의 특징, 즉 그 '위대함'과 '현학적'이란 수사를 굳이 동일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듯하다. 어느 정도 그의 '文'은 열려 있고, 사려가 깊다. 다시 '너'와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엘리아스가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은 '상호작용', '상호의존', '상호 복합' 등 '관계'의 측면이다. 여기서 '관계'라는 것은 사뭇 위대한 학자들이 끄집어내는 진부한 수사일 수도 있겠으나, 엘리아스는 단순히 어떤 감성적인 표현이자 당위적 결론으로서의 학자적 대안이 아닌, 학자가 바라봐야 할 사회 내부의 특성과 연관지어 '관계'의 역동성을 보여주려 한다. 즉, 엘리아스에게 사회학이란 우리가 공부를 하면서 늘 접하는 '환원적 태도의 거부'이다. 엘리아스에게 관계란 정태적이 아닌, 동태적인 것이다. 관계의 생동감은 즉, 앞에서 언급한 '상호'라는 말과 결부될 수 있다. 나와 너는 나 / 너 라는 구도 속에서 '/'라는 구분선, 즉 개체적 요소로 규정지어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 구분선의 명확함을 제거한 채, 구분을 넘나드는 나와 너의 불가분성에 주목하고 있음을 엘리아스는 자주 밝힌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것은 엘리아스의 '세력론'이다. 우리는 흔히 '세력'이란 말을 쓸 때, 상대적으로 큰 세력에 반하는 작은 세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세력지수'를 0으로 상정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엘리아스는 이런 규정은 틀린 것이며, '세력'을 수치로 매긴다면 양자간에 '0'이라는 수치는 매겨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엘리아스는 부모와 아기의 예를 통해 부모가 가진 외적인 특성으로 인해 아기가 갖고 있는 세력지수는 거의 0으로 매겨지는 것처럼 간주되지만,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어 아기가 어떤 세력으로서 부모에게 힘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예로 들어 아기가 앵앵거림으로써 촉발되는 그 상황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아는 온갖 곤란한 상황들을 떠올려보자.) 엘리아스는 우리 사회에서 간파해야 될 속성 중 하나로 '강제력'을 꼽는다. 여기서 강제력이란 선명하게 드러나는 강압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푸코의 '통치성'개념과 가깝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당신이 안다면, 결국 이 개념이 엘리아스가 본책에서 밝힌 인간의 '준자율성' 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푸코의 권력론과 엘리아스의 준자율성 개념을 통해 세력을 나타내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지형도를 그려본다면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이 말은 앞에서 언급된 '타자'의 철학, 이것은 단순히 '타자'라는 명명아래 주체와 타자간의 명확한 선을 그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가 상호 결합하면서 생기는 결합체로서의 사회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엘리아스에게 개인과 사회란 '사슬'과 같은 관계와 다름 아니다. 엘리아스는 사회는 사회, 개인은 개인과 같은 딱 떨어진 규정은 의미가 없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을 통해, 그리고 이 세상의 복잡함을 실제로 느끼면서, 사회학은 결정과 환원적 사고를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엘리아스의 견해를 이미 수긍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회학이 이 사회 내부의 속성을 정리하고 또 그 속성 안에서 이론적 규명화를 시도한다는 것도 맞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이 사회학을 도식화의 산물로 볼 수 있는 위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이야기처럼, 도식이 우리 사회와 그 사회에 속한 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이론은 열려 있는 것이며, 우리가 체험할 곳은 많다. 사회학은 사회를 닫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열려고 하는 것이다. 그 열림이 사회의 동학을 자극하고, 나는 그 동학으로 인해 학자의 숙명을 유지한다. 그 숙명엔 사회와 개인 간의 예측불가능성과 가변성이 늘 따라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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